[대림/성탄/송구영신 경건회 – 12/31 (10/10)]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안으로 문안합니다. 2020년 송구영신까지 지난 10일간 함께해 왔던 경건회가 오늘로 마지막 입니다.

오늘 본문은 “전도서 1:1-18″입니다.

옛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옛 사람을 그대로 가진 채로 지혜를 얻어 무엇을 이루려는 노력은 결국 번뇌와 근심만을 키우는 일입니다. 그 지혜는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입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온전히 맡기고, 그분의 손길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도 새롭고, 새로 시작되는 계절도 새롭고, 새해는 더욱 새롭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을 온통 새롭게 하실 날을 기대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좋다, 좋아. 좋다, 좋아. 참, 좋구나”라고 감탄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로 열흘 동안 함께 한 경건회를 마칩니다. 한 해 동안 어려운 중에서 믿음으로 살아온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의 위로를 전합니다. 소위 지혜롭다는 솔로몬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과 생각과 뜻이 새로워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1년 새해에 주님 주시는 복 많이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Happy New Year!

주님 안에서, 김 철 목사 드림

[대림/성탄/송구영신 경건회 – 12/30 (9/10)]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안으로 문안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1-17″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역사의 과정에서 우연히 혹은 갑자기 돌출된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시작하고 이끌어 오신 선민의 역사의 끝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이스라엘의 역사는 절정이 아니라 가장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이스라엘은 끝났고 이스라엘을 통해 하시려던 하나님의 구원 역사도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둠이 가장 짙었던 시간에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하나님은 때가 찰 때까지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과 그 가운데 나타난 경륜을 찬양합니다.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등불 같은 우리를 구원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김 철 목사 드림

[대림/성탄/송구영신 경건회 – 12/29 (8/10)]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안으로 문안합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2장 41-52절”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을 “참된 하나님이시요, 참된 인간이시다” 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자주 나오는 “반신 반인”이 아닙니다. “반신 반인”이 어떤 존재일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100% 신이며, 동시에 100% 인간이라는 사실은 상상을 불허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활 후에, 예수님의 존재 상태를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비밀이며, 신비입니다. 우리의 이성과 경험과 논리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적인 차원 너머의 실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반신 반인”의 이야기는 신화요 전설이지만, “참신 참인”의 이야기는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이 참된 인간이 되셨다”는 말은, 그분이 우리와 동일한 해부학적 구조와 우리와 동일한 감성과 이성과 의지를 가지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미 히브리서 저자가 분명히 밝힌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렇다면, 그분은 공생애로 자신을 드러내시기 이전까지는, 평범한 한 인간으로 성장하셨을 것입니다. 누가가 기록한 열두 살 때의 이야기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의식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김 철 목사 드림

[대림/성탄/송구영신 경건회 – 12/28 (7/10)]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안으로 문안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2:13-23”입니다.
인간의 무지와 거부와 역행과 악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악행은 너무도 압도적인데, 하나님의 일은 너무도 미미해 보입니다. 보이는 것은 모두 악행 뿐이고, 들리는 것은 모두 신음 뿐인 것 같습니다. 인간의 악행은 즉시로 피를 불러 오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너무도 느려 보입니다. 하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결국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게, 은밀하게, 느리게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감옥에 갇힌 요셉처럼,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처럼, 무력해 보입니다. 권력자의 폭행에 속수무책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국, 그런 사람을 통해 일을 이루십니다.

주님 안에서,
김 철 목사 드림

[대림/성탄/송구영신 경건회 – 12/26 (6/10)]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안으로 문안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2:1-12”입니다. 메시아가 태어나셨다는 소식이 가장 먼저 전해진 대상은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유다 땅에서 몸붙여 살던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들도 이방인 점성가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나셨는데, 유대인들 중에는 아무도 알아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다”(요 1:11)고 말합니다. 이 사실은, 당시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얼마나 큰 어두움 가운데 있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사실은, 또한, 예수님이 단지 유대인만의 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마태는 1장에서 이미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그분의 족보에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립니다. 예수님이 단지 유대인의 후손이 아니라, 전 인류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분의 가계(족보)에 전 인류가 참여한 것처럼, 그분은 모든 인류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지만, 또한 모든 인류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삶의 기초를 흔들어 놓으십니다. 목자들처럼 그리고 동방 박사들처럼 그 흔들림을 환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헤롯 대왕이나 유대인들처럼 그 흔들림을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분에게 심하게 흔들린 사람만이 든든한 영원한 기초 위에 설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김 철 목사 드림

[대림/성탄/송구영신 경건회 – 12/25 (5/10)]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안으로 문안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1:1-18”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시간이 시작된 첫 지점까지 가보는 여행으로 초대합니다. 현실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지만, 묵상을 통해서 경험해 보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언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한정된 우리의 이성이 이 지점에서 작동을 멈춥니다. 그래서 침묵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먼지와 다를 것이 없는 나의 존재가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깊은 ‘안식’과 ‘평안’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에 던져진 ‘미아’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아무 의미 없이 생겨난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이유 없이 생겨나, 목적 없이 살다가, 의미 없이 스러지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영원하고 절대적인 분에 의해 지어진 존재들이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할 존재들이며, 결국 그분에게 돌아갈 존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존재의 이유와 의미와 목적을 당신의 삶으로써 증명하신 분입니다. 우리 존재의 이유, 의미, 목적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알려주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다시 발견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생명을 얻고, 어둠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탄’을 축하하고 감사하며 선포하는 이유입니다.

주님 안에서,
김 철 목사 드림

[대림/성탄/송구영신 경건회 – 12/24 (4/10)]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안으로 문안합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2:1-21”입니다. 예수님은 유다 백성 중에서 가장 비천한 여인의 몸을 통해, 가장 비천한 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그가 태어날 때, 누울 곳이 없어서 짐승의 구유를 요람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에 임하신 것입니다. 가장 존귀한 분이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태어났다는 소식이 가장 먼저 전해진 사람들도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천대 받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천사들은 가장 높으신 분의 메시아가 태어나셨다는 증거로서,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12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놀랍다’는 말도 무색할만큼 경이롭고도 경이로운 아이러니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인류 역사에 그분만큼 크고도 깊고도 강한 영향을 미쳐 온 분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그분이 다시 오셔서 온 우주와 인류 역사를 철저하게 뒤집어 놓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온 우주와 인류 역사의 주인이시며 또한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이 땅에 오실 때는 이렇게 낮게, 작게, 약하게 시작하셨습니다. 인류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임하셔서, 그곳에서부터 인류 사회 전체를 뒤집어 엎으시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주님이시기에, 짐승의 우리와도 같고, 짐승의 먹이통과도 같은 우리의 마음을 열고, 주님을 모셔 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높으신 그분, 귀하신 그분, 영광스러운 그분을 생각하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분이시지만, 베들레헴의 짐승 먹이통에 누우셨던 분이기에, 감히 눈을 들어 그분을 초청합니다. 그분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시는 것이 아니고는 우리의 삶에 진정한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김 철 목사 드림

[대림/성탄/송구영신 경건회- 12/23]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67-80”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당시에, 로마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깃발 아래에 들어와야만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명분 아래 닥치는 대로 제국을 확장해 갔습니다. 당시에 로마 제국을 상대로 싸우려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로마의 속국이 되면 다른 나라로부터의 침략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외면적인 평화일 뿐입니다. 실제로, 로마 제국의 식민으로 산다는 것은, 로마의 유린과 착취와 억압을 일상으로 겪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가랴’는 메시아가 오시면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79절)이라고 예언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2:14)라고 노래함으로써, 사가랴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이것은 로마 제국의 정치 선전에 대한 아주 은밀한 도전이었습니다.
로마는 ‘전쟁으로부터의 안전’을 평화라고 불렀지만,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통해 주시는 평화는 인간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다른 생명과의 관계)가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활짝 열렸습니다.

주님 안에서,
김 철 목사 드림

[대림/성탄/송구영신 경건회 – 둘째 날]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착오가 생겨 오늘은 2개의 오디오를 보내드리게 되었는데, 앞으로는 하루 1개의 오디오를 보내드리겠습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57-66”입니다. 요한에게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주님의 보살피는 손길”이 함께 하십니다(66절).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성품) 때문입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지으신 생명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 편에서 하나님의 보살핌을 거부하고, 스스로 살기를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선택하더라도 하나님은 끝까지 그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보살피는 손길”은 누구에게나 미치고 있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 분명하게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덜 분명하게 보인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의 보살피는 손길”을 놓치지 않고, 그 사실을 망각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를 깨우는 것이 ‘영적 생활’입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를 보살피시는 주님의 손길이 늘 머무는 삶, 그 은혜가 날마다 체험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안에서,
김 철 목사 드림

[대림/성탄/송구영신 경건회 – 첫째 날]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대림절 넷째 주가 시작되는 오늘(12/21)부터 올해 마지막 날(12/31)까지 10일 동안 함께 말씀과 기도로 함께 경건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경건의 시간을 통해서, 은혜로운 성탄과 연말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39-56”입니다. 유대 산골에서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은 수 많은 화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성화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장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을 통해 일어나고 있던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일, 그 일을 대하는 두 여인의 순전하고도 세심한 처신, 그리고 두 사람의 만남에서 느껴지는 신비함 때문입니다. 이 장면을 묵상하고 있노라면, 하나님 나라가 유대 산골에 잠시 내려 앉은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주목 받지 못하던 깊은 산골에서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는 두 여인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토록 가장 후미진 곳에서 가장 비천한 여인들을 통해 시작하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 때문입니다. 그분은 가장 높으신 분이지만 가장 낮은 곳을 살피시는 분이며, 전능하신 분이지만 연약한 사람들을 찾으시는 분이고, 가장 빛나는 분이지만 가장 어두운 곳을 비추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시기에, 그분의 구원의 은총이 우리에게까지 미친 것입니다. 그런 분이시기에, 그분은 우리의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할렐루야!

주님 안에서,
김 철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