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4 성령강림후 25주 예배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안으로 문안합니다.

이번 주일은 성령강림 후 25번째 주일입니다. 2021년 교회력 마지막 주일인 ‘왕되신 그리스도 주일’과 ‘추수감사주일’을 한 주 앞두고 있습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미혹되기 십상입니다. 1년 동안 한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다는 생각에 미혹되어 자신과 인생을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21년을 살아낸 우리 모두에게, 특히 자신을 실패자나 낙오자라 생각하는 분들에게, “수고 많으셨습니다”라고, 그리고 2여 년간 계속 되고 있는 ‘코로나 19’의 위협 속에서 또 한 해를 보낸 모두에게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은 주님의 크신 은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서로를 격려해 주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 모두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번 주일에는 ‘마태복음 6장 25-33절’의 말씀을 통해, 삶 가운데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한 해를 정리하는데 유익을 삼고자 합니다. 이 말씀으로 한 주간 살면서, 우리의 삶에 베풀어졌던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믿음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히, 교회적으로, 이번 주일에는 한 해를 결산하고, 내년을 예산하는 ‘공동의회’가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바르게 애써 왔는지를 살피고, 또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지를 살피는 시간입니다. 교회의 회원들은 모두 나오셔서, 회원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모든 사람들이 각자에게 분담된 곳들의 공사를 맡아 진행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역사 였습니다(느헤미야 3장). 교우들의 많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이번 주일예배도 오전 11시에 대면과 비대면으로 함께 진행됩니다(YouTube Live: SFKPC). 복된 예배의 자리에서 뵙기를 소망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공동의회가 바로 진행되는데, 비대면예배 참석자를 위해서, Zoom 으로도 진행합니다. 단체카톡방에 올려드리는 주보에서 Meeting ID 와 Passcode 를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은혜로운 시간이 되도록 함께 기도해 주세요.

주님 안에서, 사바나제일장로교회

2021-11-07 성령강림후 24주 예배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안으로 문안합니다.

이번 주일은 “성령강림 후 24번째” 주일이자, 사바나제일장로교회 창립 10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 보면, 2주 후면,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이고 올해의 교회력이 끝나게 됩니다. 교회력을 통해 얻게 되는 유익은, 예수님의 생애를 따라 살아온 한 해의 막바지를 앞두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써 과연 올바른 삶의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고 잘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고 점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난 시간 베풀어주신 은혜를 헤아리며 감사의 시간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그러면서도 개인이든 공동체든 철저한 성찰 없이 발전할 수 없기에, 올바르게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일은 중요합니다. 비판이 나올 수도 있기에 유쾌한 시간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죠. 저희 교회의 차원에서도, 지난 10년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로서 주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가치들을 드러내고 지키고 전하는데 힘을 써왔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작년부터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으로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교회 공동체의 삶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광야에 내린 만나처럼, 우리의 매일의 삶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늘 함께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늘 “부족함에 없게” 역사하시는 은혜입니다(시 23:1). 일용할 양식이었던 만나는 광야와 같은 우리의 삶에 매일 매일의 기적을 떠올리고 기대하게 합니다. 바벨론의 풍요로움보다는 신앙의 결기를 지키며 ‘거룩한 허기’를 선택한 다니엘의 신앙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결기를 다지며, 새로운 십 년의 은혜를 구해 봅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예배는 주일 아침 11시에 대면과 비대면으로 함께 진행됩니다(YouTube Live: SFKPC). 특별히 이번 주일은 창립기념 주일이라, 예배 후 ‘애찬’을 준비하여 ‘친교의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오랜만에 베풀어지는 친교의 시간이 많이 나오셔서 함께 기쁨을 나눠주셨으면 합니다. 동반하는 자녀들을 위해, 놀이기구들도 준비하였습니다.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사바나제일장로교회

2021-10-31 성령강림후 23주, 제504주년 종교개혁기념 주일 예배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일은, 성령강림후 스물셋째 주일로, “종교개혁 504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종교개혁의 핵심은 ‘오직 말씀'(Sola Scriptura)입니다. 그래서, 여러 종교개혁가들은 각자의 모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많은 사람들이 직접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일은 신자 개인의 삶 뿐만 아리라, 교회 전체 더 나아가서 사회 전반에 걸쳐 급진적으로 때로는 점진적으로 개혁과 변화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변화는 불가피했습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6장을 보면, 소위 ‘쉐마 이스라엘’이라는 본문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일하신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선포가 온 백성을 향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하나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서기관의 질문에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연결하여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는 말씀을 더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계명(율법)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마음의 동기가 늘 악하고, 행동이 게으른 우리에게는 늘 이루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의 메시지를 보면, 사랑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요일 4장).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결국,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일 뿐입니다. 그 마음의 동기와 행위에 있어서 온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 우리를 위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려고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히 9:12)고 말씀합니다. 오직 이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만 사랑은 가능합니다. 개혁자들의 고백처럼, ‘오직 은혜(Sola Gratia)’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맺혀지는 열매이고 결실입니다.

결실의 계절입니다. 사랑을 그 열매로 결실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복된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예배는 주일 아침 11시에 대면과 비대면으로 함께 진행됩니다(YouTube: SFKPC).

주님 안에서, 사바나제일장로교회

2021-10-24 성령강림후 22주 예배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안으로 문안합니다.

이번 주일은 ‘성령강림 후 22번째’ 주일입니다. 이제 4주 후면, 대림절을 시작으로 벌써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다시’ 예수님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그의 삶과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라는 말은 ‘또’라는 반복의 의미도 있지만, ‘재도전’의 의미가 더 강합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과연 예수님을 본받는 내 삶의 목표는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음 주일은 10월의 마지막 주일로 ‘종교개혁기념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 마틴 루터에게 있어서 주요한 신학의 강조점은 ‘칭의론’입니다. ‘칭의’란, 죄인을 불러서 의롭게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이 칭의와 연관해서, 예배를 생각해 보면, 예배란 “하나님께서 죄인을 불러서 은총을 주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배에는 예배자인 우리가 무엇인가를 준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예배는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객체인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시간입니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말씀과 성찬(성례전)을 통해서 구현되는데,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말씀과 성례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일상으로 보내어 살아가게 하십니다. 한 마디로, ‘예배’란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라 할 수 있습니다.

저물어 가는 한 해를 생각하며, 일상의 의미들도 새롭게 새겨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퇴색되어버린 ‘예배’의 의미도 새롭게 살려야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예배의 주인이시고 주체이신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Call to Worship)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전능자의 그늘 아래 쉼과 안식, 위로와 격려를 얻는 경험을 새롭게 발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내일(주일) 아침 11시에 대면과 비대면으로 함께 진행됩니다(YouTube Live: SFKPC).

예배자로 만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바나제일장로교회

2021-10-17 성령강림후 21주 예배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광야와 같은 불확실성의 땅에서, 우리가 갖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준비하실 것이다”, “예비하실 것이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1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 이야기는 시험을 이긴 위대한 신앙인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정작 이 이야기의 결론은 14절에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뜻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이다”입니다(NIV; The Lord Will Provide). 그런데, 히브리어 ‘이레 (yireh)’의 뜻은 조금 다릅니다. 원어의 뜻은 ‘보다'(see)입니다. 이 단어의 뜻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사용된 구약성경의 본문을 보면, 먼저 창세기 1:3-4인데,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에서 ‘보시기에’가 바로 히브리어 ‘이레'(yireh)입니다. 또, 사무엘상 16:7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에서 ‘보거니와’와 ‘보느니라’가 바로 히브리어 ‘이레'(yireh)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어 ‘이레’는 사람이나 사물의 외적인 것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의 내적인 것을 보는 것도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이레’를 종합해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준비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상황과 우리의 마음을 먼저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는 불활실한 세상 속에서 불안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보이는 것만 볼 수 밖에 없는 한계 때문입니다. ‘여호와 이레’,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미리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 찬송가의 가사처럼, “생각만 해도 좋습니다”.

이 좋으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주일 아침 11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함께 예배하겠습니다(YouTube Live: SFKPC). 함께 해 주세요.

주님 안에서, 사바나제일장로교회

2021-10-10 성령강림후 20주 예배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지구촌의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요즘 어디를 가나 <오징어 게임>이야기입니다. 국내 드라마 최초로 전 세계 넷플릭스가 방영되는 모든 국가에서 인기 순위 1위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오징어 게임> 때문에, 옛날 추억이 담긴 놀이와 문화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설탕 달고나 모양 떼기’, ‘줄다리기’, ‘구슬치기’, ‘징검다리’, ‘오징어 게임’ 등. 추억이 새롭습니다. 드라마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의문의 서바이벌에 참가한 사람들이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극한의 게임에 도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이 드라마에 나오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인터넷에 드라마에 나오는 3명의 기독교인에 대한 흥미로운 글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드라마에는 3명의 기독교인이 등장합니다. 모두 부정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먼저, 서바이벌 게임에 참가한 244번입니다. 그는 목숨을 건 ‘징검다리 건너기 게임’에서 다른 사람을 밀어 떨어뜨린 뒤, 자신이 살았다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인물입니다. 다른 참가자들은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다른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데, 244번은 이런 감사기도를 한 후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린 그들의 희생과 피로 또 하루를 살아남았다. 죄 많은 우리 모두를 대신해 내가 그들의 희생과 주님의 선택에 감사하며 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기독교의 대속 교리와 회개의 교리를 아주 기괴하게 희화화(戱畵化) 하고 있습니다. 타인의 죽음과 고통을 자신의 감사로 여길 수밖에 없는 괴상한 기독교인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244번은 ‘종교적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인물입니다. 

다음은, 240번 참가자 지영이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목사입니다. 지영은 아빠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직업으로 목사를 선택하고서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는 유형이다. 이런 부류라면 성령이 함께하지 않는, 그냥 나쁜 인간이다.” 지영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는 엄마를 때리고, 또한 자신을 성폭행한 잔인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일이 있고 난 후에는 매번 회개 기도를 하는 가식적인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지영이 아버지는 그의 아내를 칼로 찔러 죽입니다. 참을 수 없었던 지영은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였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믿고 의지해야 할 대상으로부터 배신당한 지영은 이렇게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이 되었으며 이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가 된 것입니다. 직업이 목사인 지영이의 아빠는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들어가려 하는 자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악한 지도자입니다. 

마지막은, 드라마 끝에 등장하는 길거리의 전도자입니다. 그는 주인공 456번이 마침내 오징어 게임의 최후 승자가 된 이후, 게임 설계자들에 의해 눈이 가려지고 양손이 뒤로 묶인 채, 비 오는 거리에 버려졌을 때 등장합니다. 다른 행인들은 456번을 무시하고 지나가는데, 전도자는 다가와 주인공의 안대를 벗겨줍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일까요? 아닙니다. 전도자는 ‘섬뜩한 모습으로’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이 장면이 굉장히 기괴하게 연출되어 있어서 혐오감을 줍니다. 안타깝지만 오늘 개신교의 모습이 이렇게 영화에 투영된 것입니다. 요즘에는 거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없지만, 우리는 이 장면에서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사회적 관계’를 상실한 기독교인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은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들만의 방언’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상과 소통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도그마에 빠져 있는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오징어 게임>은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죽여야 하는 ‘극한 경쟁’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이 시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가운데 기독교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극한 경쟁의 최종 목표는 ‘돈’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인성을 빼앗고 삶의 아름다움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는 마수가 ‘돈’으로부터 나옵니다. 예배의 자리에, 찬양과 감사의 자리에 있어야 할 기독교인들이 모두 이 <오징어 게임>으로 하러 나간 것 같습니다. 믿는 자나 그렇지 않은 자나 모두 <오징어 게임>에 미쳐 있는 듯 합니다. 게임에 미쳐 있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에서는 그 어떠한 기대도 갖을 수 없다는 것을 드라마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늦은 저녁까지 게임에 빠져 놀던 아이들을 부르시던 어머님의 목소리처럼, 우리 모두는 예배의 자리로,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곳으로 부르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치료하시고, 변화시키시는 주님의 능력을 덧입어야 하겠습니다. 모두 게임을 중단하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대면예배를 희망하시는 분들은 주일 아침 11시에 예배실로 오시고, 비대면예배를 희망하시는 분들은 교회 YouTube 채널 ‘SFKPC’를 통해 Live 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바나제일장로교회

2021-10-03 성령강림후 19주 예배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주님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금주 설교본문은 ‘마가복음 10:2-16″입니다. 본문은 ‘이혼에 대한 가르침’과 ‘어린아이를 통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결혼과 이혼의 문제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가족)이라고 하는 공동체의 문제이고, 여기에는 아이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혼 문제를 통해, 그리고 ‘만져 주심을 바라고’ 다가오는 어린아이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전해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차원에서 본문을 바라보면, 주님의 뜻을 좀 더 깊이 헤아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이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모두의 가정사가 행복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정서적으로 깊이 교감하며 서로를 의지하고 지지하는 모범적인 가족도 있겠지만, 신뢰라는 것은 찾아볼 수도 없이 의심하고 미워하며 폭력마저 자행되는 가정도 있습니다. 불행한 가정들은 다양한 이유로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폭군이 존재하고, 그가 다른 가족구성원들은 착취하는 모습입니다. 많은 경우, 아내와 어린아이들이 그 대상이 됩니다. 때론, 입에 담기 힘든 성범죄가 가정 내에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두 사람만 모여도 권력관계가 형성되곤 합니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폭력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부부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성격도, 기질도, 성장배경도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에게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잉꼬처럼 다정하게 살 것 같은 부부가 조금씩 싹튼 갈등이 봉합되지 않아 이내 갈라서기를 결정합니다. 이때, 주변에서 그들에 대한 가치판단을 주의해야 합니다. 침묵해 주는 것이 오히려 그들을 위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함부로 정죄하며 손가락질하며 판단하기를 멈추는 것, 그게 미덕일 때가 있습니다.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런 성숙함을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혼의 정작 중요한 문제는 남녀 두 사람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존재하는 자녀들입니다. “가정폭력은 아이들에게서 고향을 빼앗는 일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에 그늘을 만들고, 부정적 자아 정체감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교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이 지켜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아내를 버리고, 남편을 버리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마치, 자기 소유물인양 힘없는 아내와 어린아이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다고 하는 ‘완악함’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시작된 가정을 위협하는 독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만져 주심을 바라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마음” 곧 그러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늘 나라 같은 가정을 꿈 꾼다면, 가족구성원 모두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막 10:15).

성도 여러분, 금주부터 ‘대면예배’가 재개 됩니다. 오랜만에 재개되는 대면예배라 걱정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예배 가운데 주실 은혜에 대한 많은 기대가 있습니다. 모두 나오셔서, 복된 예배의 자리에서 만나기를 희망합니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대면예배에 참여하시는 분들은 입실하면서 ‘마스크를 꼭 착용’하여야 하고, 안내에 따라 ‘발열 체크’와 ‘손 소독’을 받으셔야 합니다.

끝으로, 지난 두 주일 동안, 허리케인 Ida 피해복구를 위한 연보를 하였는데, 모두 855불 헌금이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여기에 145불을 더해서 1,000불을 교단 국내선교부인 Mission to North America (https://resources.pcamna.org/resource/mna-disaster-response-announcement/)로 보낼 예정임을 보고합니다. 우리 주님의 위로과 그들 가운데 넘치게 역사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참여해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계속해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사바나제일장로교회

2021-09-26 성령강림후 18주 예배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안으로 문안합니다.

금주 예배의 부름은 “시편 124편”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스스로 대답합니다. “대적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시편 124:2-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편이 되어 주셔서 이스라엘을 대적들의 이에 씹히도록 내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대적들이 쳐 놓은 올무에서 벗어 날 수 있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시절, 북군의 전세가 크게 불리할 때, “각하!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주실까요?”라는 각료의 질문에, 링컨 대통령은 “오직 나의 염려는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느냐는 것이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우리 중 얼마나 ‘항상 하나님의 편에 서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우리는 연약하고 어리석고 악하여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지 못한 체 고난당할 때, 대적이 우리를 치러 일어 삼키려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냥 속수무책으로 망하게 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지 못할 때도 우리의 편이셨습니다. 우리가 연약 할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도 우리의 편이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6, 8, 10).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편이 되기를 거절할 때에도, 그들을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시편 118:6-7에 보면,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는 말씀은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다”는 말씀은 ‘편 가르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행’의 의미가 더 큽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누군가의 독점의 대상이 되는 ‘누군가의 하나님’으로 오해하고 제한하면서 편을 가르고 우월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써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 누구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연약하고, 죄인 되고, 원수 된 우리의 편이 되어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번 주일도 ‘비대면으로만’ 예배합니다. 주일 아침 11시에 각자의 처소에서 함께 예배하겠습니다. 기도하시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에 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사바나제일장로교회

2021-09-19 성령강림후 17주 예배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저는 이번 주일, 예배의 부름은 ‘시편 1편’의 말씀입니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늘 깊이 묵상하며, 삶의 문제를 고민했던 많은 시편의 시인들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복 있는 삶’은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으로, 잠언의 표현으로 하자면 ‘지혜 있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을 예배의 부름 말씀으로 읽으며,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여러분들과 가정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복’을 말하면서, 우리는 주로 두 가지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나는 ‘복 받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복 있는 삶’입니다. ‘복 받는 삶’도 좋지만, ‘복 있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해야 할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 받는’이라는 표현이 아직은  이뤄지지 않는 미래형이라면, ‘있는’이란, 지금 소유하고 있는 현재형을 의미합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복 있는’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해 보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 그것은 그의 말씀에 젖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일상의 삶 속에서 거룩한 말씀을 발견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힘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복을 누리는 것이고,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의인의 모습입니다. 늘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살아가셔서 ‘복 있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시편 1편의 삶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앞에 감사함과 기쁨으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금주 예배는 주일 아침 11시에 ‘비대면으로’ 모입니다. 시간에 맞춰, 교회의 YouTube 채널인 ‘SFKPC’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모임의 방식은 ‘비대면’이지만, 예배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예배의 자리로, 찬양과 감사의 자리로 만드시는 복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사바나제일장로교회